3.1 독립선언 기독교인 서명자① 신석구목사·이승훈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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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독립선언 기독교인 서명자① 신석구목사·이승훈 장로

CBS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기독교인 16명의 삶과 신앙을 특별기획으로 조명합니다.

오늘은 신석구 목사와 이승훈 장로를 유영혁 기자가 소개합니다.

신석구 목사는 서울 수포교교회 담임목사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가장 늦게 독립선언문에 서명했습니다.

[인터뷰]김승태 소장/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 2월 27일 새벽기도 때 자기 마음 속에 4천 년 내려오던 내 감투를 내 대에 와서 잃어버렸는데, 찾을 기회가 왔는데도 찾으려고 노력하지 않는 것은 더 큰 죄가 아니냐 하는 그런 내적인 음성을 듣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바로 결단을 하고서"

신석구 목사는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출소한 뒤 충남 천안과
춘천, 원산 등 지역에서 목회했습니다.

[인터뷰]김진홍 목사/수표교교회 담임

"신석구 목사님을 보면 중앙무대를 떠나서 주로 시골에서 강원도, 황해도 우리 감리교회 황해도에서 목회를 했던, 어떤 기득권이라고 그럴까, 33인 대표라고 하는 그런 이름을 다 내려놓고 그렇게 헌신했던 분이에요."

1938년 7월 신사 참배를 거부해 천안경찰서에 체포돼 구금됐으며 1945년에는 전승 기원 예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평안남도 용강경찰서에 체포돼 3개월동안 옥살이를 했습니다.

일제와 북한에서 4차례 옥살이를 했던 신석구 목사는 한국전쟁때 평양의 북한 감화소에서 복역하던 중 인천상륙작전으로 퇴각하던 인민군에 의해 처형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신석구 목사의 유해는 발견되지 않았으며 국립현충원에 가묘가 설치돼 있습니다.

[인터뷰]김승태 소장/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그 분은 정말 섬기는 목회자, 그리고 자기희생을 각오하고, 몸소 모범을 보이는 그런 모범적인 목회자이셨고, 그리고 이 세상의 불의와 불법과는 절대로 타협하지 않으시고, 그리고 세속에 대해서 영합하지 않는."

남강 이승훈 선생은 독립운동가, 교육가, 종교인으로 우리 근대사에 빼놓을수 없는 인물입니다.

1911년 일제에 의해 제주도 유배생활을 하던중 105 사건에 연루돼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4년만에 가출옥했습니다.

[인터뷰]한규무 교수/광주대

" 이 이승훈 선생이 당시 만나고 교류하셨던 분들의 상당 부분이 기독교인들이시고, 또 평양지역이 굉장히 기독교가 센 그런 지역입니다. 아마 그런 계기에서 기독교인이 되지 않으셨을까 추측하고 있습니다. 특히 3.1운동 때문에 수감되셨을 동안에는 구약성경을 10번 통독하시고, 신약성경을 40번 통독하셨다고 하실 정도로 .

1919년 당시 기독교인 서명자 가운데 가장 연장자였던 이승훈 장로는 기독교와 천도교 대표들이 독립선언문에 함께 서명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했습니다.

[인터뷰]한규무 교수/광주대

" 천도교 측에서도 이승훈 선생에게 독립선언을 천도교와 기독교가 같이 제휴해서 추진할 수 있겠는가 의사를 타진해 오십니다. 이에 이승훈 선생께서는 기독교측 대표들을 교섭하기 위해서 장로교, 감리교 여러 인사들과 만나십니다. 그러니까 천도교와 기독교가 같이 독립선언을 제휴할 수 있도록 가교를 높으신 분이 이승훈 선생이십니다."

이승훈 장로가 세운 오산학교는 근대와 현대 우리역사에 큰 역할을 한 인물들이 배출됐습니다.

고당 조만식 선생과 춘원 이광수, 씨알 함석헌 선생은 오산학교 초기에 교사를 지냈으며
주기철 목사, 한경직 목사, 시인 김소월,화가 이중섭 독립운동가 김홍일 선생은 오산학교 학생 출신입니다.

이승훈 장로는 고등교육기관이 없던 조선에 민립대학을 세우기 위해 압장서기도 했습니다.

이승훈 장로는 1920년대 제도권 교회에 회의를 느끼고 김교신 목사 등 무교회주의자들과 교류했으며1930년 조선예수교장로회 평북노회로부터 시무치 않은 죄로 장로직을 박탈당했습니다.

[영상취재 이정우, 정선택, 최낙중 영상편집 서원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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