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 평화 힘써온 이희호 여사 소천.. 교계 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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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평화 힘써온 이희호 여사 소천.. 교계 애도

  • 2019-06-11 21:53

11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신촌동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이희호여사의 빈소를 찾은 조문객이 조문하고 있다. 이한형기자

 


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민주화와 평화운동에 힘써온 이희호 여사가 지난 10일 향년 97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빈소가 차려진 서울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는 고인을 기리는 수많은 정계 인사들의 발길이 이른 아침부터 끊이지 않았다.

교계에서도 이 여사의 소천을 애도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1970년대 민주주의를 간구했던 이들의 기도모임인 목요기도회 사진 한 장을 공개했다.

 

고 김대중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가 기도회 한 쪽에 자리한 모습이 눈에 띈다.

교회협의회는 이 사진을 공개하면서, 이희호 여사가 잠시 떨어졌던 단짝 고 김대중 대통령이 있는 곳으로 가셨다며 애도를 표했다.

교회협의회는 이 여사를 김대중의 짝이자 투쟁하는 이들의 친구, 여성의 권익과 사회적 지위를 위해 노력하고 남북의 평화로운 앞날을 위해 경계 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고 기억했다.

빈소에는 교회협의회 이홍정 총무를 비롯해 최형묵 정의평화위원장, 장상 세계교회협의회 공동의장 등이 찾아와 고인을 떠나보냈다.

이홍정 총무는 한반도 평화를 위해 애쓴 고인을 생각하며 "한반도평화 프로세스가 진행되고 있는 이 시점에 하나님께서 소임을 다 하신 걸 알고 이희호 여사를 부르신 것 같다"면서 "이제 이 역사의 남은 짐을 남은 사람들이 함께 나누어 지고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서 전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YWCA도 애도를 표했다. 이 여사는 미국 유학 후 국내에 들어와 YWCA 총무 등을 지내며 국내 여성운동의 초석을 놓은 여성운동계의 1세대였다.

한국YWCA는 오는 13일 여성계 추모예배를 드리며 여성인권 향상에 애썼던 고인의 정신을 되새기기로 했다.

한국YWCA 한영수 회장은 "남녀평등을 위한 가족법이 개정되도록 해주신 이희호 여사님이 이렇게 영면하시므로 저희들이 큰 기둥을 잃었지만 선생님의 뒤를 따라서 저희들이 같은 활동들을 계속해서 이어가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이희호 여사의 장례예배는 오는 14일 오전 7시 이 여사가 출석했던 창천감리교회에서 열린다.

◇ 질곡의 삶 신앙으로 버틴 이희호 여사

 


고 이희호 여사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군부독재시절 김대중 전 대통령의 위태한 순간에도 이여사의 기도와 믿음은 굳건한 버팀목이 됐다.

이희호 여사는 1962년 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 결혼하면서 민주화운동의 험난한 길을 함께 했다.

군부독재의 억압 속에서도 김 전 대통령이 꿋꿋이 민주화의 길을 갈 수 있었던 힘이 이희호 여사였다면 이 여사의 파란만장한 삶을 버티게 한 힘은 믿음이었다.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난 이희호 여사는 결혼 후 동교동에 자리잡으면서, 창천감리교회에 출석하며 신앙생활을 해왔다.

고난의 순간순간 마다 이 여사는 하나님을 찾으며 기도했다.

1980년 내란음모 혐의로 김 전 대통령이 수감됐을 때 이 여사가 보낸 편지를 보면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던 그의 믿음을 엿볼 수 있다.

"하나님은 당신을 하나님의 일을 위해 쓰시고자 쉬지 않고 강하게 훈련시키고 계십니다. 우리 가족 모두 믿음으로 무장하고 주님만 믿고 앞을 향해 당신과 같이 기도하며 걷고 있습니다." (1980년11월 30일 편지 ... 이희호 여사의 책 ''내일을 위한 기도' 중에서 )

이희호 여사의 신앙의 삶은 마지막 가는길까지 이어졌다.

임종 당시, 가족과 지인들은 이 여사가 평소 가장 좋아하던 성경구절인 시편 23편을 낭독하고, 이 땅에서의 작별인사를 나눈 것으로 전해졌다.

한국 현대사를 몸으로 살아내며 평생 믿음을 놓지 않았던 이희호 여사. 97년 질곡의 삶을 마감하는 순간에는 말씀 속에서 깊은 평온함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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