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신 교단에서 열린 첫 '여성안수 공청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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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신 교단에서 열린 첫 '여성안수 공청회'

  • 2023-03-28 14:58
찬, 반 의견 팽팽히 맞선 신학공청회

- 여성 안수는 성경에서 벗어난 세속화의 흐름
- 우리 시대 교회가 반드시 가야 할 길

여성 안수 어떻게 볼 것인가?

여성 안수에 관한 공청회가 24일, 늘빛교회에서 진행되었다.여성 안수에 관한 공청회가 24일, 늘빛교회에서 진행되었다.목사장로 여성안수에 대한 관심 또한 높아가는 가운데, 우리나라의 대표적 보수교단인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총회에서 여성안수 공청회가 처음으로 열려 관심을 모았다.

부산동부노회가 지난 24일 오후 2시, 늘빛교회에서 개최한 공청회는 <여성안수,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주제로 찬성에 한성국 목사(평화교회), 반대에 임경근 목사(다우리교회)가 발제자로 나섰다.
 
오랜 기간 여성안수제 도입 운동을 벌여온 한성국 목사는 "여성안수제도는 우리시대 교회가 반드시 가야할 길이다"면서 "성경말씀에 따르면 복음은 여성안수를 결코 제한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또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라'라는 구절과 늙은 여자에겐 '선한 것을 가르치는 자들이 되고 젊은 여자들을 교훈하라'라는 상반된 구절을 복음 전파의 관점으로 보거나 문맥을 살펴봐야 하는데 오늘날 여성 지도력 확립은 교회 변화와 활력의 필수적인 요소가 됐다"고 강조했다.

반대 발제자로 나선 임경근 목사는 여성안수 문제를 기독교 역사를 통해 설명하면서 "여성안수는 성경에서 벗어난 세속화의 흐름이다"고 말했다.

한편, 이번 공청회는 부산동부노회 중부시찰회가 1년 전에 상정한 '여성안수제도 도입' 안건에 대한 노회결의 중 "고시부에 맡겨 1년 간의 연구와 공청회를 거쳐 봄노회에 보고하기로 하다" 의 결의내용에 따라 개최됐다.

☞ 아래는 찬성 발제자로 나선 한성국 목사의 발제문

여성안수제도, 우리시대 교회가 반드시 가야 할 길!    

1. 여성안수금지, 이젠 바뀌어야 한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헌법은 목사, 장로의 자격을 "남자 세례교인으로 무흠하게 7년을  경과한 자(교회정치 제40조1항 / 65조1항)"로 규정한다. 나는 이제 이 규정을 개정해 서 '여성도 목사 장로로 안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무릇 우리의 모든 주장은 '성경 말씀'에 따라야함이 원칙이다. 그래서 이 글도 성경에 근거하며, 성경해석에서 다음  세 가지 기본원칙을 밝힌다.  
첫째, 어떤 말씀에는 그와 대립하는 말씀이 있다. 따라서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대립하는 말씀을 잘 살펴보아야 한다. 둘째, 대립하는 말씀이 어떤 상황에서  기록한 것인지 그 맥락을 살펴야 한다. 신학·사회문화적 배경 등을 잘 살펴서 말씀의  실제의미에 다가가도록 애써야 한다. 셋째, 성경을 읽는 목적이 하나님나라 선포임을  기억해야 한다. 성경연구는 자기 교리의 정당성과 완결성 추구가 아니라 하나님나라  성취에 얼마나 긍정적으로 이바지하는데 있다.  

2. 성경해석에서 기억해야 할 세 가지 사실  
2.1. 첫째, 많은 성경(진리)에는 그와 대립하는 말씀이 있다.  
"상반되는 두 논리.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모든 것이 이단이 된다. 나아가 각각의 진리가 끝날 때마다 반대되는  진리를 상기해야 한다."(팡세:460항) 파스칼의 말처럼 쟁점이 되는 어떤 성경을 바르 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대립하는 말씀을 살펴야 한다.  
잘 아는 몇 구절을 보자.  
바울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그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다"(롬 4:2-3)고 말하지만, 야고보는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 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약2:21)이라고 말한다.  
시인은 하나님을 향한 예배는 "나팔소리로 찬양하며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하며 소고 치며 춤추어 찬양하며 현악과 퉁소로 찬양하는"(시150:3-5) 일이라고 말하지만, 정반 대로 예언자는 예배(찬양)하는 자들을 향해 "네 노랫소리를 내 앞에서 그쳐라, 네 비 파 소리도 내(하나님)가 듣지 아니하리라"(암5:23)고 외친다.  시인은 하나님이 곁에 계심을 믿기에 "여호와는 내 편"(시118:6-7)이라고 고백하지 만, 예언자는 하나님의 입을 통해 "나는 네(이스라엘) 대적이라"(렘21:13)며 시인의  고백과 정반대되는 말을 한다.
사실 우리는 성경에서 이런 예를 수없이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이같이 대립하는  구절을 살피는 일을 두려워해서는 안 되며, 이것은 자기 논리란 좁은 울타리를 넘어 서기 위한 중요한 시작이다. 모순은 진리의 반대 표지가 아닐 뿐더러 이런 모순이야 말로 진리를 풍성하게 드러내는 자리임을 기억하자.

2.2. 둘째, 상반된 구절들을 '문맥'에서 살펴봐야 한다.  
대립하는 성경은 그 자체로 두어서는 안 되며 그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문맥을 살펴보아야 한다. "말들을 다르게 배열하면 다른 뜻을 나타내고 뜻을 다르게  배열하면 다른 결과를 불러일으킨다."(팡세:944항) 언어는 인간의 삶을 반영하기 때문 에 그 언어가 등장하는 집단의 생활방식과 행동양식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하나의 낱말은 오직 문장의 맥락 속에서 의미를 지닌다. 겉으로 비슷하고 어쩌면 동 일하기까지 보이는 단어, 문장, 구절들도 상이한 총체에 통합될 때에는 전혀 다른 뜻 을 지닐 수 있다."(비트겐슈타인)
앞에 본 구절들을 다시 살펴보자.  
유대인의 그릇된 율법 행위 사상과 맞서야 했던 바울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강조해 야 했다면, 그 믿음의 원칙이 화석화된 상황을 본 야고보는 아브라함이 행함으로 의 롭게 되었다고 주장한다.(롬4:2-3/약2:21)
시인이 하나님을 향한 예배는 밋밋한 강론이 아닌 갖가지 음악이 어우러진 축제임 을 강조했다면, 아모스는 의식(儀式)에 집착한 채 정작 하나님의 뜻에는 무관심한 형 식적 예배를 비판한다.(시150:3-5/암5:23)
시인은 여호와가 내 편이심을 믿어 사람에 대한 두려움을 넘어서라고 말했다면, 예 언자는 하나님의 뜻을 외면한 채 안일에 빠진 유다 왕가에게 하나님은 오히려 그들의  대적임을 알려주어야 했다.(시118:6-7/렘21:13). 형식적인 언어에서 보면 모순으로 보 이지만 각각의 형편에서 살피면 그 어떤 모순도 없다.  

2.3. 셋째, 대립하는 구절들을 복음전파의 관점에서 읽어야 한다.
바울의 말처럼 그리스도인의 말과 행동은 오직 '복음에 참여하는 데 있다.'(고전 9:23) 사실 모든 성경의 저자들은 각자의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과 씨름했으니, 이 같 은 복음실천이야말로 성경해석의 목표다. 그런 뜻에서 말씀의 모순(대립)은 다양한 삶 의 자리에서 펼쳐진 복음실천의 모습이다. "성경의 불일치와 비일관성은 더 깊은 진 리를 가리키기 위해 하나님이 의도한 것이다. 불일치와 비일관성은 문제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본문이 얼마나 심오한지 알려주는 신호이다."(바턴) 문자로는 각각 모 순처럼 보이지만 다 같이 자신의 자리에서 복음 선포(하나님의 진리)에 성실했음을 드 러내는 표이다. 이제 이런 세 가지 관점(틀) - 이것은 성경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누구나 가져야할 자세다 - 에서 여성 안수 문제에서 쟁점 되는 바울의 유명한 구절들 을 살펴보자.

3.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전14:33b-40)
3.1. 첫째, 대립하는 말씀에서 보자.
이제 여성안수문제에서 가장 논쟁 되는 두 가지 말씀을 보자. 바울은 분명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그들에게는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으며",(고전14:34)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하라"(딤전2:12) 고 말한다. 하지만 잘 살펴보면 바울은 여자가 교회에서 (잠잠하지 않고) 기도(예언)할  수 있음을 인정한다. 단지 '머리에 무엇(수건)을 쓰고' 하라고 권면한다.(고전11:5) 또  바울은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라"(14:35)고 말하지만, (늙은)  여자에게는 "선한 것을 가르치는 자들이 되고 젊은 여자들을 교훈하라"(디도2:3-4)고  말한다. 여기서 가르침은 교회에서 공적 활동을 말한다.  
이런 대립(모순)은 다음에도 이어진다. 바울은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고 여자가 속아 죄에 빠졌다"(딤전2:13-14)는 창조와 범 죄의 순서를 들어 여성의 종속성을 말한다. 하지만 바울의 신학에서 과연 창조와 범 죄의 '순서'가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일 수 있을까? 오히려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  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다. 그리고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났다"(고전11:12) 는 말을 보면 창조순서는 큰 의미가 없다. 범죄의 순서도 보자. 바울은 로마서에서  구원의 원리를 설명하는 앞부분에서, 모든 사람이 죄인임을 힘주어 말하며 "인간은  모두 죄 아래 있기에 의인은 없으며 하나도 없다"는 범죄의 보편성을 길게 설명한다 (롬1:18-3:20). 이렇게 볼  때 범죄의 순서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처럼 창조(또는  범죄)의 순서는 결코 불변이거나 절대적인 의미를 지닐 수 없다.
바울은 "율법에 따르면 여자는 (남자에게) 복종하는 것"(고전14:34)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하나님이 범죄한 여자에게 하신 말씀, "너(여자)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 를 다스릴 것"(창3:16)이라는 말씀에서 온 것인데, 이 말씀 또한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갈 3:28)라는 사실과 대립한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그리스도 속량의 은총을 통해 이 제 어떤 차별도 없음을 밝힌다. 나아가 바울은 '(율법으로 인해) 죄가 더해지지만 그 리스도의 은혜는 그 범죄를 뒤덮고 넘친다'(롬5:20)고 선언하지 않는가. 그리스도 복 음의 능력, 곧 구속의 현실은 창조의 옛 질서를 넘어서고 타락의 질서를 깨뜨려버린  것이다.  
사실, 그리스도 복음의 보편성과 충만함을 강조하는 바울에게 여성과 남성의 창조순 서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방인과 유대인의 차이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그에게 누가  먼저 타락했는가가 왜 중요한가? 복음 안에 새로운 피조물인 그리스도인은 이제부터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한다.(고후5:16,17) 그리스도인의 생각과 교회의  최종 질서를 결정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이다. 여성의 위치는 율법이 아니라  복음 안에서 이해해야 한다. 이것이 바울의 신학이다.  

3.2. 둘째, 성경의 맥락에서 보자,  
지금 고린도교회(고전11장) 안에는 '예언과 기도'로 혼란이 일어났음을 볼 수 있다.  여기서 기도는 공적 기도이며 예언은 오늘로 말하면 말씀을 풀어내는 설교와 같다.  성령의 역사로 이런 은사가 성도들에게 임했는데, 일부 여성들이 예배 중에 수건을  벗고 예언과 기도를 했다. 당시 결혼한 여성들은 머리에 (정절과 순결의 상징인) 수건 을 써야 했다. 여자는 배우자(남편)의 영예인데, 여자가 머리에 쓴 수건을 벗는 것은  남편을 부끄럽게 하고 남편의 공적 이미지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지금 이런 여 성들 때문에 교회 안에 문제가 생겼고 이로 인해 사회로부터 나쁜 평을 듣게 되었다.  바울은 이 일에 반대하여 여자는 관습을 따라 기도와 예언할 때 반드시 머리에 수건 을 쓰라고 말한다. "너희는 스스로 판단하라 여자가 머리를 가리지 않고 하나님께 기 도하는 것이 마땅하냐."(고전11:13)  
고린도전서 14장의 문맥도 보라. 그리스도인은 성령을 힘입어 방언과 예언을 했는 데 지금 이 방언과 예언으로 교회예배가 혼란스러워졌다.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 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14:33)이시기에 방언은 통역자가 있을 때만, 예언은  질서 있게 행해야 한다. 특히 지금 일부 여성들이 '예언'에 대해 교회 안의 남성들과  토론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공공장소에서 여성이 남성과 토론하는 것은 여러 가지  오해의 소지가 있었으니, 때로 성적 유혹으로 여기기도 했다. 그래서 바울은 (결혼한)  여성이 공적 모임(교회)에서 다른 남성들과 토론하는 것을 금하면서 "만일 무엇을 배 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 (14:35)"이라고 말한다. 만약 이 문제를 방치할 경우 교회는 부도덕한 집단으로 비칠  위험이 있었다. 지금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힘들지만 이런 맥락에서 보면 능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14:34)는 이 구절은 여자들로 교회에서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침묵하라'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임했는데 어찌 침묵을 강 요할 수 있겠는가! 단지 '질서를 지키면서 예언(방언)을 하라'는 말이다. 이것은 개역 개정판성경의 흐름처럼 33절 후반부와 연결해서 이렇게 읽어야 한다. 곧  "모든 성도 가 교회에서 함과 같이(질서를 지켜야하듯이) 여자는(도) 교회에서 잠잠해야 한다 (sigao)."(14:33b-34a) 그것은 누구든 '(방언하다가)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고(sigao,28)', '(예언하다가) 곁에 앉아 있는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으면 잠잠해 야 하듯이(sigao,30)' 여자들도 질서를 지켜 잠잠해야 한다. 이처럼 바울은 '모든' 여 성에게 교회에서 예언(기도, 방언)하거나 배우고 가르치는 것을 금하려는 것이 아니 다. 단지 "그런즉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14:39-40)가 그의 뜻이다.  
바울의 생각은 이러하다 : 여성들이여. 성령의 은사를 받았다고 아무렇게나 말하거 나 행동하지 말라. 여러분이 문제의 장본인이기에 교회의 질서를 위해 예언(기도, 방- 4 언)을 금할 수밖에 없다. 나는 '현재로서는' 여성이 가르치거나 남자를 다스리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3.3. 셋째, 복음 선포의 관점에서 보자.  
왜 바울은 지금 여성에게 "교회에서 잠잠하라, 가르치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 남자를  주관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말하는가? 그것은 한 마디로 지금 여성들의 행동이 복음 전파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었다. 여성들의 과도한 발언과 주장이 교회를 어지럽혀 하 나님의 복음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가 방언보다 예언을 높이 평가한 이유도 보라.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알지 못하는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고전14:23) 그것은 교리적 판단이라기보 다 복음전파의 유익 때문이었다.
머리에 수건을 쓰는 것(고전11장)도 보자. 당시 가부장적 사회에서 이것은 여성이  남성에게 종속된다는 표지, 그 사회를 지탱하는 질서였다.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서 복 음이 주는 자유와 평등을 깨달은 일부 여성들은 그 틀을 벗어나려 했다. 수건을 벗는  것이 대표적인 일이었다. 이 행동은 여전히 그 질서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낯선 풍 경이었고, 사람들로 교회공동체에 들어오는 것을 가로막는 하나의 장애물이었다. "주 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다"(고후3:17)고 선언한 바울이 복음의  자유와 평등을 거부했을 리 없다. 단지 바울은 지금 여성들의 과도한 행동 때문에 복 음전파의 길이 막히는 것을 염려한다.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딤전2:11-15)는 말씀도 보자. 지금 일부  여자들이 거짓 교사들의 부추김을 받아 가정생활과 사회풍속에 어긋나는 행동으로 문 제를 일으켰다. 에베소교회에서 온 것으로 보이는 거짓 교사들은(딤전1:3) 다른 교훈 을 가르치고 신화와 끝없는 족보 이야기와 터무니없는 변론을 일삼았다.(1:3,4) 혼인 을 금하고 어떤 음식을 먹지 말라고 가르쳤으며(딤전4:3) 부활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딤후2:18)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능력을 부인하는(딤후3:5) 이들은 심지어 경건을 이 익의 수단으로 이용하기까지 했다.(딤전6:5) 특히 어리석은 부인들을 유혹하여 그릇된  가르침을 전파했으니,(딤후3:6-7) '땋은 머리와 금과 진주나 값진 옷'을 장식한 부유 층 여성들이 그 대상이었다.(딤전2:9) 이 여성들은 지식에 대한 욕구가 강해서 늘 공 부하지만 참된 지식에는 도달하지 못했으며,(딤후3:7) 건전한 교훈을 받기보다는 자신 의 귀를 즐겁게 하는 말을 들으려고 자기네 욕심에 맞는 선생을 따랐다.(딤후4:3) 이  여성들은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않고(딤전5:8) 집집으로 돌아다니면서 쓸데없는 말로 (5:13) 공동체의 평화를 깨뜨렸다.(6:4) 그런데 지금 이 여성들이 공동체 안에서 지도 력을 발휘하여 남자들을 가르치고 다스리려 했던 것이다.
(2:12) 이것은 막 싹이 돋아나는 초기기독교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바울은 교 회를 지켜야 했다. 그는 이 작은 공동체가 시대와 마찰을 일으켜 공공질서와 풍습을  훼손하는 비밀스런 종파 중의 하나라고 오해받을까 염려했다. 그는 복음의 길이 이 - 5 일로 가로막히지 않기를 바랐던 것이다.  

3.4. 언제나 복음전파와 교회의 유익이 중심이다.  
바울을 비롯한 성경저자들의 교훈(행동)의 기준은 그것이 복음전파에 얼마나 유익한 가였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교회에서 생활비를 받을 자격이 있으나 교회의 유익을  위해 포기했으며(고전9장), 우상에게 제물로 바쳐진 고기를 능히 먹을 수 있으나 형제 를 실족할 가능성이 있다면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전8:13)고 다짐한다. 고전7 장을 보자. 여기서 바울은 믿지 않는 부부에게는 이혼하지 말 것을, 혼인하지 않는  남녀에게는 독신을, 약혼녀와 과부에 대해서는 그냥 지낼 것을 권한다. 이것은 교리가  아니라 오직 "아내(남편) 된 자여 네가 남편(아내)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 요"(고전7:16)라는 복음전파의 가능성 때문이다. 바울은 말한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 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것이다."(빌1:20) 아내들을 향 한 베드로의 권면도 같은 이유다.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이 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다."(벧전3:1) 이것이 성경의 한결같은 관점이다.
여성에 대한 바울의 기록에서 대립하는 말씀들을 찾고, 그 말씀이 주어진 각각의 맥 락을 정확히 이해하자. 그리고 대립하는 말씀들은 다양한 상황에서 펼쳐진 복음실천 이었음을 기억하자.  

4. 초기 기독교시대 여성참여.    
4.1. 로마서 16장을 보자.  
바울은 긴 인사문에서 그가 아는 인물을 로마교회에 소개하면서 7명의 여성을 소개 한다. 이들은 다른 남성들과 같이 교회의 지도자들이었다. 바울은 이 서신의 전달자로  여성사역자 뵈뵈를 추천한다. 그는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diakonos)이고 바울의 '보 호자'(prostatis)였다. "바울은 로마서를 로마교회에 전달하는 책임자로 뵈뵈를 파송했 다. 고대사회에서 편지의 전달자는 수신자들에게 발신자를 대신하여 편지의 내용까지  설명하는 역할을 했다. 뵈뵈는 이 위대한 신학서신 로마서를 잘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신학·목회적 훈련을 받은 사람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최갑종) 브리스길라는 '예 수님 그리스도 안에서 바울의 동역자(sunergos)'다. 그는 바울과 함께 복음을 위해 목 숨을 걸고 힘썼다. 그는 남편 아굴라와 함께 등장하는데 언제나 이름이 남편보다 앞 에 나올 정도로(고전16:19 예외) 복음전파에 적극적인 여성이었다. 그 밖에 마리아는  (남편으로 보이는 안그로니고와 함께) 로마교회를 위해 '많이 수고한' 여성이다. 유니 아(Iounia)는 복음을 위해 바울과 함께 감옥에 갇혔을 뿐 아니라 "사도들 가운데서도  뛰어난 사람이다." 곧 사도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훌륭한 사람이었다.  

4.2. 여성들이 자신들의 집을 (가정)교회로 제공했다.  
당시 문화에서 여성은 공공 활동에 참여할 수 없었다. 하지만 교회는 여성들을 받 아들였고 그들이 제공한 집에서 모임을 가졌다. 몇몇 가정교회에 대한 기록을 보면  그 집의 안주인 이름이 나와 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의 집(고전16:19), 라오 디게아의 눔바의 집(골4;15), 바울과 함께 복음에 힘쓰던 저 여인들(빌4:3)이 그들이 다. 특히 빌립보 지역에서 루디아가 세운 교회를 보라.(행16:13-15)  

4.3. 성령은 여성들을 차별 없이 복음에 참여하게 했다.  
"그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으리라."(행2:17-18) 누가는 요엘서 를 인용하여 성령이 남녀 차별 없이 임했음을 노래한다. 앞서 살핀 것처럼 성령의 역 사를 힘입어 여성들이 교회의 예언(기도, 방언)에 참여했으며, 바울은 이들의 예언(공 적 기도)활동을 보장했다.(고전11장) 유대인의 율법과 세속의 풍습은 여성들의 참여를  꺼렸지만 바울은 여성들의 참여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단지 바울은 여성들이  예언할 때 머리에 수건을 쓸 것을 명령한다. 곧 바울은 순서를 지키지 않고 예언하거 나, 통역할 기회를 주지 않고 방언하여 혼란을 초래하는 여자들을(남자들도 함께) 책 망할 뿐이다.(고전14장) 그의 주요 관심은 여자들의 예언을 금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 라 혼란을 바로잡아 교회 질서를 세우는 일이다.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베풂을 금하리요."(행10:47) 이방인이란 장벽 앞에서  망설이던 베드로가 성령의 임재를 보며 그 벽을 넘어섰듯이, 사실 성령의 역사를 누 가 막을 수 있겠는가!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님 안에서 하나니라."(갈3:28) 이것은 당시 세례에서 사용된 공식 문구이다. 여기 하 나님의 은총인 세례를 통해 죄로 인한 인간 사이의 분열과 갈등이 극복되고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다는 선언이다. 하나님나라에서는 유대인과 이방인, 종과 자유인, 남자 와 여자 사이에 나타나는 긴장과 차별이 사라진다. 물론 그 일은 당시에는 온전히 이 루어지지 않았으니, 그 일의 온전한 성취는 미래의 일이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은총  안에서 그 일을 선취(先取)한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그 일에 실제로 참여한다.  

5. 여성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  
5.1. 예수님은 여성을 언제나 긍정적으로 대하신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동에는 여성비하나 차별이 전혀 없다. 2000년 전 가부장적 사 회에서는 놀랍다. 그분은 여성들을 치료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또 주님은 남성  우월주의를 비판하신다. 여성은 한갓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남성과 동등한 인 격체이다. 모든 복음서를 읽어보라. 그런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5.2. 특히 누가복음은 '여성이야기'를 중요한 주제로 다룬다.
누가는 자신만이 알고 있는 예수님과 여성의 만남에 대한 많은 자료를 보여준다.  예를 들면, 탄생기록에 등장하는 마리아를 보라.(누가1-2장) 마태와 견줄 때 누가의  예수님 탄생기록의 특징은 분명하다. 마태복음에는 메시아탄생을 알리는 천사가 요셉 에게 나타나고 헤롯의 박해와 이집트로 피난하는 아기 예수님을 이끄는 사람도 요셉 이다. 반면에 누가의 탄생기록에 보면 천사는 요셉이 아니라 마리아에게 나타나며 마 리아는 처녀잉태라는 위험을 받아들인 용기 있는 사람이다. 장차 태어날 아기 메시아 를 통해 이룰 새 세상을 노래한 '마리아 찬가'(1:46-55)는 놀랍다. 그 노래는 '낮은  자가 높아지고 높은 자가 낮아지는' 하나님나라의 혁명적 전망을 드러낸다. 아기 예수 님을 만난 여성 선지자 안나를 보라. 그는 혼인하여 겨우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과부로서 84년을 기다린 사람으로 바로 그가 메시아를 만났다.(2:36-38) 바리 새인 시몬의 집에 초청받아 방문하신 예수님을 찾아가 향유를 부어드린 여자의 이야 기도 보라.(7:36-50) "이 여자를 보는가!" 주님은 놀랍게도 이 여자를 바리새인을 비 롯한 그곳 사람들이 따라야 할 신앙의 모범으로 세우신다. 하나님나라 운동에 물질로  참여한 여러 여성들과 그 이름들을 보라.(8:1-3) 마리아와 마르다 자매의 이야기 (10:38-42)에서 예수님은 "그가 참으로 좋은 것을 선택했다"며 마리아를 칭찬하신다.  주님은 안식일에 등 굽은 여자를 고치시면서 그를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선언하신 다.(13:10-17) 그들에게 아브라함의 '아들'이란 말은 있어도 아브라함의 '딸(!)'이란 말 은 없었다. 이를 듣고, "모든 반대하는 자들은 부끄러워하고 온 무리는 그 하시는 모 든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했다."

5.3. 마가14:1-9은 여성을 대하는 예수님 태도의 절정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마가14:9)라는 놀라운 선언을 보라. 이  여자가 무엇을 했단 말인가? 십자가의 죽음을 앞둔 지금, 제자들을 비롯한 모든 사람 들은 그 의미를 몰라 당황하고 두려워 떨었다. 그 때 이 여자는 찾아와 예수님의 머 리에 향유를 부었다. 주님은 말씀은 이것이다 "아! 아름다운 사람아! 나는 그대의 행 동의 뜻을 안다. 그대는 나의 죽음을 예비하고 있구나. 나의 죽음을 드러내고 있구나.  집안 가득 퍼진 이 향기처럼 그대는 내 죽음의 뜻, 그 고귀함을 드러내고 있구나! 십 자가의 길은 하나님의 길, 생명을 여는 길인데도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구나!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는 길, 그래서 어리석은 것, 미련한 것, 두려운 일로 취급받는구나! 그 러나 그대는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의 의미를 아는구나! 그 죽음의 고귀함을 드러내려 고 그토록 값비싼 향유를 준비했구나. 그대는 이 일을 위해 '힘을 다하여'(8절) 내 몸 에 향유를 부었구나. 여기 내 마음 알아주는 벗 하나 있으니, 내 걸음 더 굳게 정하 고 끝까지 걸어가리라." 이 여성은 십자가의 죽음을 앞둔 그곳에서 복음의 중심에 다 가간 유일한 사람이었다. 우리는 이 여자가 행한 일을 통해 십자가를 (잊을 것이 아 니라) 깊이 마음에 새기고,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기꺼이 맞이하며, (수치스런 것이 - 8 아니라) 고귀한 것으로 알며, (숨길 것이 아니라) 공적으로 드러내야 함을 깨닫는다.   당시 여성의 행동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의 진술은 법정에서 채택할 가치조차 없 었다. 그들의 서원은 그 자체로 의미가 없고 남편과 아버지의 승낙이 있어야 효력이  있었다.(민수기30장) 하지만 주님은 우리로 '여자'를 기억하라고 말씀하신다. "온 천하 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라"  하여, 이 같은 주님의 선언을 보면서도 여성들이 교회 지도자로서 자격이 없다고 말 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예수님께 중요한 것은 여성(남성)이 아니라 그가 한 행동이 다.  

6. 여성안수는 성령의 역사를 따르는 우리 시대의 순종이다.  
6.1. 여성안수는 성경에 합당한 제도다.  
파스칼의 말처럼 "사람은 누구나 어떤 진리를 따르고 있으며, 그럴수록 더 위험스럽 게 잘못을 저지른다. 그들의 잘못은 어떤 허위를 따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진리를 따르지 않은 데 있다."(팡세:455항) 성경이 여성안수를 금한다는 주장은 자신 들이 알고 있는 성경 몇 구절에 과도한 의미 부여이다. 곧 대립하는 구절에 눈감거 나, 성경이 기록된 상황을 외면하거나, 우리 시대 복음전파의 방향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경텍스트를 정확히 이해하려고 힘쓰자. 많은 성경텍스트는 모순(대립)하는 텍스트 를 갖고 있고, 그 텍스트의 상황을 살펴보면 그 나름대로 하나님나라 실현을 위한 몸 짓이었음을 깨닫는다. 성경텍스트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새로 운 의미, 곧 우리 시대의 복음 과제와 씨름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성경텍스트가 우리 시대에 던지는 복음의 과제, 우리 시대의 독자지평, 곧 여성에  대한 시대의 요구를 보라. 오늘 우리 사회 어느 곳도 여성차별을 용납하지 않는다.  작은 차별요소라도 있는지 살피고 그것을 넘어서려고 한다. 그것은 사회의 진보이고,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갈3:28)라는 하나님의 복음이 지향하 는 바다. 이런 의식을 갖고 자란 세대가 교회의 일원이고 우리가 복음으로 만나야 할  사람들이다. 사정이 이런데도 여전히 교회가 법으로 여성안수를 거부하며 여성은 교 회의 지도자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태도일까? 새롭게 자라나는  여성들은(남성들도) 이런 주장에 결코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6.2. 복음은 시대가 주는 올바른 도전을 받아들이며 새로워진다.
어떤 이들은 복음이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교 회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아야 한다.(로마12:2) 하지만  여성안수제도는 시류에 영합 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성경을 바르게 읽고 그것을 시대에 맞게 새롭게 실천하 려는 노력이다.  
나는 이 글을 준비하면서 제38회 총회(1988년)의 다음과 같은 결의를 읽었다. "장- 9 애자 목사안수제한을 해제하고 목사 안수하기로 하다." 이 결의는 그때까지 교회가  장애인에게 목사안수를 제한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 결의 또한 성경의 근거가 있었 을 것이니, 그것은 아마 "제사장 아론의 자손 중에 흠이 있는 자는 나와 여호와께 화 제를 드리지 못할지니 그는 흠이 있은즉 나와서 그의 하나님께 음식을 드리지 못한 다"(레21:21-23)였을 것이다. 여기서 '흠'이란 성경에 따르면 시각장애인, 발 부러진  사람, 손 부러진 자 등과 같은 장애를 말하며, 이를 근거로 장애인에게 목사안수를  제한했던 것으로 보인다. 장애인을 목사로 안수할 없다는 것은 명백한 장애인차별이 다. 그런데 그때까지 교회는 성경에 근거한다며 장애인차별을 정당하게 여겼다. 문자 (숭배)주의의 오류다.  
그럼 교회는 어떻게 해서 이런 문자주의를 극복하고 장애인에게도 목사안수가 가능 하다고 결정했을까? 물론 진지한 성경연구를 통해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더 실제적 으로는 우리 사회의 진보 때문이었다. 곧 장애인 인권에 대한 의식이 진보했고 이런  사회적 분위기가 우리로 옛날의 잘못된 결의를 바로잡게 했다. 그와 함께 지금껏 잘 못 이해하고 머물러있던 성경이해를 넘어서게 했다. '성경을 읽는 독자(시대)'가 성경 을 '새롭게'(바르게) 읽도록 자극했던 것이다. 사실 성경은 처음부터 장애인의 목사안 수를 제한한 적이 없었으니, 우리는 시대의 변화를 통해 그 사실(진리)을 뒤늦게 깨달 았던 것이다. (이런 예는 기독교가 노예제도에 대한 태도와 그 수용과정을 살펴보면   잘 볼 수 있다)  

6.3. 여성안수는 우리 시대 복음 선포를 위한 길이다.
여성안수거부는 여성에 대한 존재론적 차별이다. 오늘 '예수의 복음'을 이야기하는  우리에게 이런 차별이 과연 가능한 논리일까? 만약 교회가 이것을 계속 고집한다면  사람들이 복음으로 들어오기는 고사하고 현재 교회에 있는 사람들마저 복음을 외면할  것이다. 바울시대에는 여성의 과도한 참여와 주장이 교회를 어지럽히고 복음을 방해 했다면 오늘은 여성안수금지가 교회를 침체하게 하고 복음전파의 걸림돌이다. 바울시 대에는 일부 여성들의 무질서와 지나침이 문제였다면, 오늘에는 여성들의 수동성(여성 안수금지)을 강요하는 제도가 복음전파를 가로막고 있음을 기억하자.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그때와 전혀 다른 상황에서 '복음에 참여하고' 있다. "여성안수제도"는 오늘  교회가 반드시 제정해야 할 제도이다. 이를 통해 여성들이 교회 활동에 책임감 있는  주체로 참여하여 교회는 활력을 얻고, 복음전파의 문은 새롭게 열릴 것이다.  
'모든 남자와 여자에게 임하리란' 성령이(행2:18) 고린도교회에 임했듯이, 오늘도 남 녀 모두에게 차별 없이 임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은혜(성령)를 입은 모든 그리스도 인에게 교회 지도력을 허용하는 것은 복음의 원리이다. 그들은 교회의 지도자로서 능 히 그 임무를 감당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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