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그리스도교 ''박해와 순교''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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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그리스도교 ''박해와 순교''의 역사

  • 2010-12-01 17:22

4백년 전 내려진 기독교 금교령…250년 동안 숨어서 신앙 지켜

{VOD:1}우리는 ''일본 교회'' 하면 언뜻 교세가 작은 교회만을 떠올리곤 하지만, 일본의 기독교는 ''박해와 순교'' 라는 의미있는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기독교 신앙을 꽃피운 나가사키 현을 중심으로 일본의 기독교 역사 현장을 취재했다.

일본에 복음이 전해진 것은 1550년 포르투갈 하비에르 선교사가 나가사키현 히라도를 찾으면서부터다. 이후 지역의 각 영주들이 기독교 신앙을 수용하면서 복음은 일본 땅에 빠르게 전파됐다.

신앙을 지킨 ''박해와 순교''의 현장

그러나 16세기 말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을 통일하면서 곧바로 박해는 시작됐다. 그리스도인들이 같은 신앙으로 결속하는데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다.

토요토미는 오오사카와 교토에서 활동하던 서양 선교사들을 체포해 나가사키까지 800킬로미터를 끌고가 처형했다. 일본인을 포함해 모두 26명이 십자가에 메달려 처형된 이 사건은 1597년에 일어난 일본 최초의 순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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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토미에 이어 토쿠가와가 정권을 잡은 17세기는 기독교 박해가 절정에 달했다.

나가사키현 남쪽에 있는 시마바라 하라성에서 민중봉기가 일어나자 이를 그리스도인들의 집단봉기로 인식한 도쿠가와는 부녀자와 아이들까지 3만여명을 모두 몰살시킨다. 하라성터에서는 아직도 많은 인골과 십자가가 발굴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1627년부터 1631년까지 나가사키현 남부 운젠 온천지역에서는 기독교 신앙을 지녔다는 이유만으로 펄펄 끓는 온천물에 던져져 고문과 처형을 당했다.

또 시마바라성 영주였던 마쯔쿠라 시계마사는 1627년 충신인 우찌보리가 기독교 신앙을 포기하지 않자 5살짜리 아들을 포함해 일가족 4명과 기독교인 11명, 모두 15명의 손가락을 잘라 추운 겨울 바다에 수장시켰다. 손가락을 자른 것은 수영을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아리마 지역에서는 1613년 2만명 이상의 신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기독교인들이 화형을 당하기도 했고 오오무라 코오리 마을에서는 신앙을 지킨 131명의 목을 잘라 목과 몸을 따로 묻는 박해도 이어졌다. 이는 그리스도인들의 부활을 두려워한데 따른 극한 처형이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 시대부터 기독교 금교령이 해제된 메이지 시대까지 300년 가까운 기간 동안 일본 그리스도교의 역사는 박해와 순교의 연속이었다. 이 과정에서도 굳굳하게 이어온 신앙의 뿌리는 우리를 숙연하게 한다.

박해를 피해 숨어서 지킨 250년 신앙

{VOD:2}400년 전 일본에서 기독교 박해가 펼쳐졌을 때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불교도로 가장하거나, 섬과 산으로 숨어 들어가 신앙을 지켰다. 그 기간이 무려 250년, 7대에 걸쳐 지켜낸 신앙이었다.

도쿠가와 막부가 1614년 기독교 금교령을 내리고 진행한 박해는 실로 전방위적이었다.

기독교 신앙을 꽃피운 나가사키 지역도 예외가 아니어서 모든 서양 선교사들은 추방당하거나 순교했고, 일본 그리스도인들은 산으로, 섬으로 숨어들어가야만 했다.

숨어 들어간 그리스도인을, 지금도 일명 ''카쿠레 키리시탄''이라고 부른다. ''카쿠레''는 ''숨는다''는 뜻이다.

이들은 박해를 피해 집에서 혹은 산속에서 기도를 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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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키현 소토메 지역의 한 산속. 이 곳에는 카쿠레 키리시탄들이 공동기도를 드렸던 큰 바위가 있다. 이들은 큰 돌 밑에서 공동기도를 드렸다.

돌로 만들어진 이들의 묘. 그 돌 위에는 공기돌 크기의 작은 돌들이 놓여있다. 평소에는 그저 흩어져있지만 기도할 때는 이 돌들로 십자가를 만들어 경배하고 다시 흩어놓는 식으로 비밀스럽게 신앙을 지켰다.

카쿠레 키리시탄들이 가장 두려워 했던 것은 ''후미에''다. 박해에 나선 영주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나 성모 마리아를 조각한 돌판을 놓고 밟고 지나가게 했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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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거부하면 처형되지만, 돌을 밟으면 목숨만은 건질 수 있었다. 많은 이들이 이 돌을 밟고 불교도인 것처럼 위장한 채 살아가야 했지만 남 몰래 자신을 회개하고 공동기도를 드리며 신앙을 지켜왔다.

나가사키 순례센터 이리구찌 사무국장은 "카쿠레 키리시탄 문제는 아주 복잡한 문제"라면서 "당시 기독교인 임을 밝히고 순교하는 것이 옳은지, 후미에를 밟으며 불교도로 살아 남아 신앙을 지켜온 것이 옳은지 섣불리 판단할 수 없는 문제"라고 말한다.

이들은 당시 대예언자 바스찬이 "먼 훗날 신부가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예언을 믿었고, 7대에 걸쳐 무려 250년 동안 신앙을 지켜왔다.

이리구찌 사무국장은 이렇게 신앙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신앙심도 중요하게 작용했지만, "예언자 바스찬이 교회 예전을 기록한 달력을 만들어 전승시켰기 때문에 신부가 없는 250년 동안의 공백기를 메울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1873년 금교령이 해제된 이후에는 이들중 많은 이들이 천주교로 흡수돼 새로운 부흥기를 맞지만 아직도 자신들만의 신앙을 지키고 있는 카쿠레 키리시탄들도 있다.

이들의 비밀스런 신앙양태 때문에 전체 통계는 집계되지 않고 있지만, 키리시탄 연구가인 마쯔카와 씨는 "나가사키 소토메 지역만 살펴보면 애초 7천명의 카쿠레 키리시탄이 있었는데, 신자 발견 당시 2천5백명이 교회로 돌아가고, 나머지는 아직 카쿠레 키리시탄으로 살고 있다"고 말했다.

일본의 카쿠레 키리시탄 역사는 초대 로마교회 카타콤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이들의 존재는 60년 넘게 신앙의 자유를 잃어버린 북한 땅에도 숨어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적지 않을 것임을 미루어 짐작케 한다.

일본 기독교 유적지, 세계문화유산 등록 추진

{VOD:3}일본의 천주교회와 관계 당국은 나가사키현에 집중돼있는 기독교 유적을 세계문화유산에 등록시키기 위해 힘쓰고 있다.

일본 나가사키시에 있는 오오우라 성당. 1864년, 외국인을 위해 세워진 이 성당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당으로 현재 국보로 지정돼있다.

특히 250년 동안 숨어서 신앙을 지켜온 카쿠레 키리시탄들이 1865년 이 교회를 찾아오면서 숨어있던 신자를 발견한 교회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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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근 우라카미 지역의 카쿠레 키리시탄들은 당시 오오우라 성당 프치쟌 신부를 찾아와 성모 마리아상을 찾으며 "신부님의 마음과 우리 마음은 같다"고 자신의 신앙을 고백했다.

이때 처음으로 금교령 아래에서도 250년 동안 신부가 없는 최악의 조건에서 신앙을 지켜온 이들이 있음을 알수 있었다.

당시 이 사건은 서구 가톨릭교회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고, ''카쿠레 키리시탄''의 존재가 주목받는 계기가 된다.

1873년 기독교 금교령이 해제되면서 일본 각 지역에는 성당들이 잇따라 세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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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키현 시세보시에서 해상 30여 킬로미터 떨어진 쿠로시마섬. 이 곳까지 숨어들어온 카쿠레 키리시탄들은 금교령 해제 이후 모두 천주교로 돌아왔고 함께 교회당을 세운다.

쿠로시마 성당은 일반 목재를 보다 아름답게 하기 위해 신도들이 정성스레 손으로 직접 나무결을 그려넣은 천장과 문들이 눈길을 끈다.

1902년에 완공된 이 성당은 국가지정 중요문화재로 등록돼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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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로 돌아온 카쿠레 키리시탄을 위해 1893년 소토메 지역에 세워진 오오노 교회당. 자연석 돌로 쌓은 교회 외벽이 아름답다. 이 교회당 역시 국가지정 중요문화재다.

나가사키현에 있는 1백여개 기독교 유적 가운데 국보를 비롯해 국가지정 중요문화재는 15개, 현과 시 단위의 지자체 지정 문화재는 거의 모든 유적지를 포함할 정도로 많다.

일본 정부와 지자체 관계 당국과 일본 천주교는 나가사키현 일대의 기독교 유적지를 이미 세계문화유산 후보에 등재시켜 놓고 정식 등록을 위해 힘쓰고 있다.

나가사키 순례센터 나카무라 신부는 "3년 후에는 정식 등록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밝혔다.

새 교회당을 건축할 때 기존 건물을 철거하는 사례가 많은 한국교회 현실에서 선조들의 신앙유적을 소중히 여기고 이를 세계문화유산으로 승화시키려는 노력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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