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민주화 운동 과정을 다룬 영화 '1987'이 관객 500만 명을 돌파하며 인기 몰이 중인 가운데,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열사들의 이름을 외치며 오열하던 故 문익환 목사에 대해서도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특히 올해는 문 목사가 태어난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박종철 열사여! 이한열 열사여!"
영화 '1987'에 나오는 마지막 장면. 문익환 목사가 전태일 열사와 박종철 열사, 이한열 열사 등의 이름을 부르며 울부짖는다.
문익환 목사는 영화의 단 한 장면에 등장했지만, 어느 등장인물 못지않게 강한 울림을 남겼다.
우선, 문익환 목사는 한국교회가 배출한 대표적인 민주화 운동 인사다.
박정희 정권이 긴급조치 9호를 선포하고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그 어떤 활동도 인정하지 않던 시절, 문익환 목사는 박정희 정권의 퇴진을 촉구한 1976년 3.1 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며 민주화 운동 전면에 등장했다.
1980년 내란 예비 음모죄로 다시 감옥에 들어갔다 나온 뒤에도 민주 통일국민회의 의장 등을 지내며 반독재 운동과 통일 운동에 앞장섰다.
특히 1989년 3월 25일부터 4월 3일까지 방북한 사건은 여전히 한국 현대사에 큰 사건으로 남아 있다. 북한에서 돌아온 즉시 또 다시 옥고를 치러야했지만, 그의 통일을 향한 열정을 꺾지는 못했다.
1970~80년대를 기억하는 많은 이들이 문익환 목사를 민주화운동 인사로만 기억하지만, 사실 문 목사는 학자이자 목회자로서도 많은 활동을 펼쳤다.
문익환 목사는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기 전 개신교와 천주교가 함께 진행한 성서 공동번역에도 참여했다.
특히 목사 안수를 받기 전 만주의 만보산한인교회와 신경한인교회에서 전도사로 사역했고, 한빛교회와 갈릴리교회에서는 담임목사로서 목회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문익환 목사는 흔히 민주화 운동 인사로 알려져 있지만, 교회 담임목사를 역임할만큼 신앙과 행동이 조화를 이룬 목회자였다.
문익환 목사의 제자이자, 그의 뒤를 이어 한빛교회 담임을 맡았던 이해동 목사는 문 목사가 지녔던 사상의 뿌리는 신앙이었다고 말했다.
이해동 목사(한빛교회 전 담임)는 "문익환 목사는 생명 존중 사상을 가지고 민주화 운동에 뛰어 들었다"면서도 "결국 그의 사상의 뿌리는 신앙"이라고 말했다.
문익환 목사가 세상을 떠난 지 24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그의 신앙 정신을 기리며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