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
3.1운동 99주년을 맞아 일제강점기에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던 인물들의 생애를 재조명하는 움직임이 활발합니다.
미국 북장로교에서 파송을 받아 교육 선교활동을 펼쳤던 해밀턴 선교사는 신사참배거부운동을 펼치면서 일제의 만행을 미국에 알렸습니다.
송주열 기자의 보돕니다.
[리포트]
숭실대학교가 일제강점기에 신사참배거부운동을 펼쳤던 플로이드 해밀턴 선교사(1890-1969)의 신학사상과 생애를 담은 <함일돈>을 펴냈다.
해밀턴 선교사는 3.1운동 이듬해 인 1920년 1월, 30세의 나이로 가족들과 함께 한국 땅을 밟았습니다.
미 북장로교 파송을 받은 해밀턴 선교사는 한 달 뒤 국권을 강탈한 일제에 의해 고난을 당하는 한국인들의 상황을 미국에 알렸습니다.
[내레이션] 플로이드 해밀턴 선교사 (1920년 2월 15일 편지)
“지난 주에는 영하 17도까지 내려가는 매우 추운날씨였습니다. (중략) 마펫(Moffett)씨가 감옥에서 풀려나온 한 남자에게서 직접 들은 바에 따르면 감옥에서 그 남자 옆에서 자던 남자가 밤새 얼어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죽은 사람이 얼마나 더 많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해밀턴 선교사는 서한을 통해 일제에 의해 왜곡된 한국인들의 독립 열망과 식민 지배에 저항하는 상황을 사실 그대로 전하기도 했습니다.
[내레이션] 플로이드 해밀턴 선교사 (1920년 2월 15일 편지)
“전에 죄수들을 고문하고 있었던 사람이 지금 그대로 ‘예비조사’를 하고 있음은 물론입니다. 하지만 한국인들은 감옥에서 이런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고 나와서 독립을 위한 투쟁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전보다 더 투철하게 다질 뿐입니다.”
해밀턴 선교사는 일제가 민족 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이를 거부하는 운동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개신교계가 일제의 회유와 강압에 못이겨 신사참배 결정을 내린 것과 대조적으로 해밀턴 선교사는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벌여 가택연금을 당하는 등 고초를 당했습니다.
파란 눈의 선교사가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모습은 학생들과 민중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데 적잖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인터뷰] 성신형 조교수 / 숭실대 베어드학부대학(함일돈 저자)
“로마서나 갈라디아서 등 성서를 가르치시면서 신앙의 정수를 지키는게 뭔지 강조를 많이 하셨을 것 같구요. ”
일제의 눈엣가시였던 해밀턴은 1940년 본국으로 추방을 당했다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공군 통역장교로 참전하기도 했습니다.
[인터뷰] 성신형 조교수 / 숭실대 베어드학부대학(함일돈 저자)
“한국을 너무 사랑하고 한국을 위해서는 평생을 바치고 싶다는 마음때문에 1948년 고려신학교에서 초청했을 때 다시 오겠다는 그러한 결심..이미 미국에서 자리잡고 계셨는데 다 포기하고...”
숭실대의 전신인 평양 숭실에서 20년 동안 교육선교활동을 펼친 해밀턴은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며 기독교교육과 성경수업을 진행했고, 보수정통신학 형성에 영향을 미친 기독교변증론을 편찬 하는 등 그 누구보다 한국을 사랑했던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CBS뉴스 송주열입니다.
영상취재 최현 최내호
영상편집 이승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