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성광교회 박상규 목사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각종 시위를 이끌었다.
1980년 5월 18일. 비상계엄령 반대 시위를 위해 전남대에 모인 학생들을 신군부가 강제로 진압하며 역사적인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 시작했다.
광주 시민들의 거센 저항에 5월 21일 계엄군은 잠시 철수하게 되고, 시민들이 광주의 참사를 주변 지역에 알리면서 민주화 운동은 전남 일대로 퍼져나갔다.
목포에서도 광주에서 벌어진 유혈진압 소식을 듣고 분노한 수만 명의 시민들이 매일 목포역 광장으로 모여 횃불시위와 시가행진을 벌였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박상규 목사(광주 성광교회)는 목포 시민민주화투쟁위원회 집행위원장을 맡아 각종 시위를 이끌었다.
박상규 목사는 "'목포 시민들이 광주 시민을 위해 항의하고 저항해 달라' 이 호소를 들은 시민들이 목포역 광장으로 모였다"며 "훗날 성령의 역사였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신군부에 의한 무자비한 학살이 자행되고 옛 전남도청이 끝내 함락되면서 목포에서 활동 중이던 박 목사 역시 결국 체포돼 고문을 당하고 옥고를 치렀다.
하지만 이를 통해 박 목사는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됐고, 5.18 광주 민주화 운동 희생자와 빈민 등 어려운 이웃을 위한 목회에 매진했다.
박 목사는 사회적으로 성공했다는 사람들이 권력의 하수인으로 전락하는 현실을 보며 낮은 사람들과 함께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박 목사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내게 다메섹 도상이었다"며 "만약 살아서 석방이 된다면 낮은 사람들과 함께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박 목사는 5. 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인류의 어떤 혁명 역사에서도 볼 수 없는 특별한 사례로 평가했다.
생필품이 다 떨어지고 통신이 두절되는 등 완전한 고립 상황 속에서도 자발적으로 헌혈을 하고 생필품을 나누며 끝까지 하나 됐던 시민들의 정신을 강조했다.
그리고 그 뒤에는 다양한 자리에서 적극적으로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많은 기독교인들의 역할이 있었다.
박 목사는 "많은 기독교인들의 항쟁 지도부 또는 수습위원회에, 병원에서 상처 치유에, 또는 시신 처리 등에 신앙 양심으로 참여했다"고 말했다.
박 목사는 현재 광주 성광교회를 담임하며 민주화 운동을 통해 그가 경험한 하나님의 사랑과 나눔의 정신을 전하고 있다.
그는 "특별히 광주 민주화 운동에서 보여줬던 초대교회의 사랑과 나눔의 공동체, 희생과 섬김의 공동체 등 그런 교회를 섬기는 하나님나라의 운동가"라고 자신을 정의했다.
민주화운동에 투신한 청년이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세워지는 박상규 목사의 이야기는 CBS 초대석을 통해 만날 수 있다.
본방 : 18일 오전 10시, 재방 : 18일 밤 11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