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
내일은 100년 전 3.1만세운동의 도화선이 됐던 2.8독립선언이 10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일제강점기 한인 유학생들이 일본 심장부인 동경에서 주도한 독립선언이라는 역사적 의미에도 불구하고 이를 주도했던 인물 연구는 미비하다는 지적입니다.
송주열 기자의 보돕니다.
[기자]
1919년 2월 8일 독립선언을 위해 일본 동경한국YMCA 회관에 모인 유학생들 모습(출처 = YMCA 100년사)
100년 전 1919년 2월 8일 오전 10시 일본 동경.
백관수, 송계백, 김도연, 최팔용 등 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 임시실행위원들은 조선의 자주독립을 천명하는 독립선언문과 항일 혈전 의지를 담은 결의문 등을 일본 주재 각국 대사관과 일본 국회, 언론사에 배포했습니다.
오후 2시, 6백여 명의 한인 유학생들이 재일본 동경한국YMCA회관에 모였습니다.
한인 유학생들은 일본의 심장이나 다름없는 동경에서 한,일합방의 부당함과 민족의 자주독립을 외쳤습니다.
더불어 일제가 한민족의 생존을 위협하고 동양의 평화를 요란케 한다며 조선의 독립을 위해 영원히 피를 흘리겠다는 결사항전의 의지도 천명했습니다.
[인터뷰] 이순자 박사 /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책임연구원
"오후 2시 시간이 돼서 회장이었던 백남규가 개회사를 선언을 하고요. 백관수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김도연이 강대상에 올라가서 결의문을 낭독하면서 만세 삼창을 부르게 됩니다.”
조선의 독립을 위한 청년들의 기개는 일제의 무차별 체포로 진압되는 듯 보였지만, 다음 달 한반도 전역에서 일었던 3.1만세운동의 도화선으로 작용했습니다.
실제로 2.8독립선언 후 이를 주도한 학생들은 투옥됐지만, 나머지 학생들은 유학생활을 접고 국내로 들어오게 됩니다.
당시 일본 당국 조사에 의하면 2.8독립선언 후 귀국한 한국인 수는 총 491명으로 이 중 유학생이 359명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들 대부분은 자신들의 고향으로 내려가 3.1운동의 밑거름이 됐습니다.
이처럼 학생들이 독립운동에 투신할 수 있었던 데에는 기독교 신앙의 힘이 컸습니다.
[인터뷰] 이순자 박사 /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책임연구원
"청년들의 모임이 YMCA에서 이뤄지게되면서 자연스럽게 기독교에 입문하고 입교하기도하고 기독교정신을 받아들이는 상황이었다고 봅니다. 대표적으로 2.8 선언서를 낭독했던 백관수 같은 경우는 (일본에)유학가기전 서울YMCA에서 간사로 청년으로 활동했었던 인물입니다."
[인터뷰] 주건일 팀장 / 서울 YMCA 시민사회운동부
"대한민국의 독립을 넘어서서 세계평화를 열망하는 운동이었고, 자유와 정의를 외치는 선언이었습니다. 현대 오늘날 사회에 억압받는 사람과 억눌린 사람들을 해방하는 그런 선언으로 재해석 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2.8 독립선언을 주도했던 11명의 인물 연구는 3.1운동에 가려 연구가 제대로 돼있지 못한 실정이어서 이에 대한 연구와 재평가가 필요하다는 지적입니다.
이런가운데 서울 YMCA는 오는 15일 2.8독립선언을 주도한 일부 인물들에 대한 자료집을 출간할 예정입니다.
CBS뉴스 송주열입니다.
영상취재 최현 정선택 최낙중 편집 서원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