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
오늘은 2.8 독립선언 100주년 되는 날입니다.
한 세기 전 소외되고 억압받던 여성의 몸으로 2.8 독립선언에 가담하고 3.1 만세 운동에도 앞장섰던 기독 여성, 김마리아 선생의 생애를 조명해봅니다.
송주열 기자의 보돕니다.
[기자]
사진은 서울 송파구 올림픽로에 위치한 김마리아회관 전시실 모습.
1910년 정신여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김마리아는 1914년 일본으로 건너가 금성학원, 동경여자학원에서 공부하던 중 1918년 동경유학생 재일조선청년단에 가담해 이듬해 2.8독립선언에 주도적으로 참여했습니다.
2.8독립선언 후 귀국길에 오른 김마리아는 "여성계에서도 조직적으로 독립운동에 나서야 한다"면서 부산과 대구, 광주, 서울을 돌며 3.1운동 사전 준비에 전력을 다했습니다.
[인터뷰] 조영호 교감 / 정신여고
“당시 소외되고 억압받던 여성의 몸으로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일평생 독립운동을 펼치셨습니다. 여성의 한계를 뛰어 넘어 원대한 목표를 향해서 헌신할 수 있었던 것은 나라와 민족에 대한 사랑을 자신의 사명으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김마리아의 목숨을 아끼지 않은 나라 사랑은 결국 일제의 표적이 됐고, 1919년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서 모진 고문을 받아야만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뼈 속에 고름이 생기는 병을 얻는가 하면 인두 고문으로 오른쪽 가슴을 절개하는 고통을 겪는 등 가진 고초가 이어졌지만 선생의 독립에 대한 의지는 꺾을 수 없었습니다.
선생이 입었던 저고리의 어그러진 섶이 고문의 흔적을 말해줍니다.
[인터뷰] 조영호 교감 / 정신여고
“인두로 시뻘건 불에 달궈진 인두로 오른쪽 가슴을 지지는 고문을 받으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가슴을 절개할 수밖에 없었고 그 이유로 평생 층이 지는 저고리를 입으셨다고 합니다.”
김마리아 선생은 출옥 후에도 교육자로, 독립운동가로서의 삶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모교인 정신여학교에 본부를 둔 대한민국 애국부인회를 비밀리에 결성해 상해 임시정부를 돕는 가 하면 1923년 미국 유학길에 올라서도 애국부인회를 확장해 일제의 가혹한 식민지 정책을 서방에 알리는 활동을 했습니다.
미국에서 신학을 전공한 뒤 1933년 귀국한 선생은 원산 마르다윌슨 신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1934년부터 1938년까지 대한예수교장로회 여전도회 전국연합회장으로 재임하면서 기독 여성들의 민족 의식을 고취시켰습니다.
독신 여성으로 대한민국의 독립과 결혼했다고 말했던 김마리아 선생의 나라 사랑은 안창호, 김구 선생에게도 깊은 감동을 줬습니다.
[내래이션] 안창호 선생
“김마리아 같은 여성동지가 10명만 있었던들 한국은 독립이 되었을 거라고 미국에서 1923년 봄에 말한 적이 있어요” -1943년 대보산장에서
[내래이션] 김구 선생
“상해임시정부시절입니다. 미국에서 대한민국 애국부인회 회장 김마리아씨가 자주 독립기금을 보내왔습니다. 김마리아씨는 상해를 거쳐 갈 때도 자신은 조금도 돌보지 않고 많은 활약을 했습니다.” - 1946년 여성동지 회견에서
일제의 집요한 회유로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변절하던 시절에도 김마리아 선생은 신사참배 거부운동과 항일투쟁운동을 계속했고, 감옥에서 얻은 지병 악화로 1944년 3월 13일 서거했습니다.
조국의 광복을 1년 남겨 두고 눈을 감은 김마리아 선생은 항일 독립투쟁의 대모이자 민족의 장래를 위해 후대의 교육에도 힘썼던 인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CBS뉴스 송주열입니다.
영상취재 정선택 최낙중
영상편집 김유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