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BS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기독교인 16명의 삶과 신앙을 특별기획으로 조명합니다.
오늘은 김병조 목사와 김창준 목사를 천수쳔 기자가 소개합니다.
평안북도 정주 출신의 김병조 목사는 이승훈 선생과 양전백 목사 등 당시 북측의 인사들과 함께 거사를 모의하면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게 됩니다.
서울 태화관에서 열렸던 선언식에는 참석하지 않고 의주지역에서 만세운동을 이끌었습니다.
[인터뷰]고지수 박사/성균관대
"의주 지역이 서울과 동일하게 당일에 거사가 일어난 최초의 지역이기도 한데요. 굉장히 시위운동이 활성화된 지역인데요. 그 지역의 일을 맡아서 실제로 지방 순회강연을
하면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공문을 발송하는 그러한 임무를 받게 됩니다. 사전에 논의가 된 일이고요."
김병조 목사는 목회자이면서 교육자이기도 했습니다.
봉천의 삼송소학교, 중학교, 광명학교 교장으로
학교를 운영하기도 했습니다.
3.1 만세운동이 일아난 뒤에 중국으로 망명해 상해한인교회에서 목회활동을 하면서 상해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의 운영에도 참여했습니다.
해방후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반공광복단 활동이 북한당국에 노출되면서 시베리아로 유배돼 그곳에서 사망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인터뷰]고지수 박사/성균관대
"수용소 이름이 바이칼호에 있는 28호 수용소라고 그 증언에 나와있어요. 거기에서 이제 마지막 모습을 이제 증언이 나와 있고요. 한인들이 얼마 안 있을텐데 모아서 예배를 인도하시고, 기도하시고, 염원하시고 그런 모습들이 지금 증언에 남아있습니다."
김창준 목사는 3.1운동 당시 31세로 독립선언 서명자 가운데 가장 젊은측에 속했습니다.
[인터뷰]김흥수/목원대 명예교수
"박희도와 김창준은 지금 종로 2가 뒤쪽에 있는 중앙감리교회 전도사였습니다. 같이 전도사이고 동료니까 민족대표를 찾아나서다가 김창준 목사에게 그런 권유를 한 거죠. 당시 박희도는 31살 이었습니다. 김창준도 31살."
김창준 목사는 일본 도교의 아오야마학원을 거쳐 미국 시카고의 개렛신학교에서 공부한 뒤 목사안수를 받았습니다.
김창준 목사가 개척한 시카고한인감리교회는 지금도 시카고한인사회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김창준 목사는 귀국한 뒤 감리고신학대 교수로 있으면서 경제적인 불평등을 헤소하는 방안을 고민하다 사회주의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1946년 10월 대구항쟁이 일어나자 남한보다는 북한에서 평등한 사회를 이루기 쉬울 것이라 생각하고 월북했습니다.
[인터뷰]김흥수/목원대 명예교수
"자기 명예욕이나 다른 개인적인 이유 때문에 월북한 사람이 니다. 이 사람은 분명한 신학적인 동기가 있었고, 그 동기를 북한 사회에서 실현 가능하다고 봤던 거죠. 그런 자기의 신학적 전망이 북한 사회에서 구체화될 거라고 전망을 했는데 그 전망이 일부는 실현됐지만 성공했다고 볼 수는 없죠."
북한에서는 우리의 국회격인 최고인민회의 부의장의 역임했으며 평양의 애국열사능에 묻혔습니다.
[영상촬영 이정우 영상편집 서원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