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3.1 만세운동 10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3.1 만세운동은 당시 종교 가운데 가장 세가 강했던 천도교와 아주 미미했던 기독교 지도자들이 계획하고 실행했습니다.
당시 기독교 인구는 20만명을 조금 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기독교계의 입장에서 보면 3.1 운동은 1%가 온 나라를 움직인 경우입니다.
2019년 한국의 기독교인은 천만명 정도로 추정됩니다.
100년 전보다 50배 이상 늘었습니다.
한국의 기독교는 엄청난 규모의 확장에도 불구하고 나라를 움직였던 1%의 기독교인들보다 긍정적인 영향력이 적거나 부정적인 영향력이 커 보입니다.
왜 지금의 기독교는 존경의 대상이 아니라 주로 비난의 대상이 됐을까?
1919년 당시 기독교 지도자들은 전반적으로 일반인들처럼 가난했습니다.
지금의 기독교 지도자들도 일반인처럼 가난한 사람도 있고 부자인 사람도 있습니다.
1919년 당시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일반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신학문을 받아들인 것으로 평가받았습니다.
지금의 기독교 지도자들 상당수는 일반인에 비해 더 깊은 소양이나 인격을 갖추었다고도 볼수 잇습니다.
부나 지식, 소양 등을 놓고 1919년의 교회와 지금의 교회를 단면적으로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1%와 25%의 영향력이 다른 이유는 다른 측면에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기독교역사가들은 당시 선교사들은 정교분리의 개념을 강조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독립운동가들은 죽기를 각오하고 참여했습니다.
정교분리 논리는 목회자와 기독교인들에게 진지한 고민이기도 하지만 사회적 책임을 회피하는 논리이기도 합니다.
3.1운동 당시 전반적으로 보수적이었던 기독교 독립운동가들은 정교분리의 개념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역사가들은 분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교분리라는 신학적인 개념과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민족의식이 균형을 이뤘거나 더 강했을 것이라는 판단할수 있습니다..
왜 조선의 백성들은 1% 밖에 안되는 교회 지도자들의 만세운동에 순순이 호응했을까 하는 의문은 여전히 남습니다.
일반인들이 일제의 강압통치에 전반적으로 무력했던 정부 관료나 정치인들은 믿지 못했지만 교회의 목사는 믿을수 있었다는 것이 역사가들의 평가입니다.
이는 부와 지식, 소양이 깊은 사람에게 보내는 존경의 마음보다 더 미묘하고 복잡합니다.
1%의 교회, 25%의 교회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적인 신뢰의 문제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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