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문동환 목사의 빈소. 이한형기자
일제시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근현대사의 산증인으로 살아온 문동환 목사가 9일 오후 98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故문익환 목사의 동생이기도 한 문동환 목사는 1921년 북간도 명동촌에서 태어나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독립운동을 했던 이들을 보며 성장했다. 특히 북간도 명동촌의 지도자였던 김약연 목사는 고인에게 ‘목사’의 꿈을 심어줬다. 북간도 출신 마지막 생존자였던 고인은 CBS TV가 방송한 다큐멘터리 ‘북간도의 십자가’에서 목사로 살겠다는 다짐이 곧 민족을 위해 살겠다는 다짐이었다는 육성을 남겼다.
“내가 일곱살 때 목사가 되려고 결정을 했거든. ‘너 커서 뭐가될래?’ 하고 물었거든. 그러니까 내 머리에 떠오른 것이 김약연 목사야. 목사가 어떤 일을 하는 것이지 생각해보니 김약연 목사는 목사인 동시에 교사요, 만주 일대 한국인의 지도자거든. 목사가 되겠다는 것은 민족을 위해서 그렇게 살고 싶다고 하는 말과 같은 거야.”
한 세기 역사를 살아온 삶에 대해 고인은 ‘역사’가 자신을 만들었다는 고백을 남겼다. 목사이자 신학자, 교육자, 민주화운동가, 정치인 등 스스로 ‘떠돌이 목사’라고 부를 만큼 교회와 사회에서 역사의 증인으로 살아온 고인은 마지막까지 ‘역사’를 강조했다.
“진지하게 살면 역사와 통하게 되고 예수님하고 교류하게 되는 경험을 가질거야. 그것이 가장 중요하지. 내가 영웅적으로 살았다는 게 문제가 아니라 역사가 나를 그렇게 끌고 갔지. 역사가 우리를 만들어줘. 지금도 누워서 명동 동거우(고향마을) 언덕에 있는 나리꽃 생각이나..”
고인은 한신대학교의 전신인 조선신학교를 졸업하고 웨스턴신학교와 프린스턴신학교를 거쳐 하트퍼드신학대학에서 종교교육학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고 한국에 돌아와 1961년 한신대 교수로 부임했다. ‘민족을 위해 사는 것이 목사의 삶’이라는 신념이 말해주듯 고인은 시대의 아픔 속으로 뛰어든 삶을 살았다.
한신대 교수로 재직하던 고인은 군부독재에 맞서 민주화운동을 펼치다 1975년 유신정권의 탄압으로 해직됐다. 이어 1976년 긴급조치 철폐와 의회정치 회복을 요구한 ‘3.1 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과 문익환 목사 등과 함께 구속됐다.
2년여 간의 수감생활을 마치고 출옥한 고인은 1979년 동일방직 및 YH 노조원 투쟁을 지원하다 다시 옥고를 치렀다. 유신정권이 막을 내리고 대학에 복직했지만 신군부에 의해 또 다시 해직된 문 목사는 미국으로 망명했다가 1985년 한신대 교수로 복직했고, 1988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권유로 전국구 의원으로 국회에 진출했다.
평화민주당 수석부총재까지 지낼만큼 정치인으로 입지를 키웠지만, 문 목사는 1992년 돌연 미국인 아내와 함께 다시 미국으로 떠나 성서 연구와 집필에 매진했다. 그러면서도 한국의 현실에 눈을 떼지 않으며 통일운동에도 적극 나섰다.
2013년 한국으로 돌아온 문동환 목사는 90이 넘은 나이에도 ‘예수냐, 바울이냐’, ‘두레방 여인들’ 등을 집필하고, 세월호 참사와 양극화 등 사회 문제에 대한 소신을 펼쳐왔다.
故 문동환 목사의 빈소는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으며, 입관예배는 11일, 장례예배는 12일 오전9시 수유리 한신대학원 채플실에서 진행된다. 하관예배는 12일 마석 모란공원에 진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