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BS논평] 1905년 즈음의 우리나라는 - 지형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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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S논평] 1905년 즈음의 우리나라는 - 지형은 목사

  • 2023-03-17 23:25



지금부터 120년 전 우리나라 상황입니다.

1897년에 조선은 대한제국으로 나라 이름을 변경하고 세계에 공표했습니다. 황제가 통치하는 주권 국가를 표방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국제 정세에서 우리나라는 미약하고 위태로웠습니다.
 
1904년 2월 8일 일본이 러시아를 기습 공격하면서 러일전쟁이 시작됩니다. 선전포고는 이틀 뒤에 있었습니다. 미국과 영국이 사실상 일본을 편들고, 1905년 러시아 자국 내에서 일어난 혁명 등의 상황으로 전쟁은 1905년 9월 5일 포츠머스강화조약으로 일본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이 와중에 1905년 7월 일본 수상 가쓰라와 미국 육군장관 태프트가 도쿄에서 만납니다. 미국의 필리핀 통치와 일본의 한국 보호권을 서로 양해하는 가쓰라태프트밀약입니다.

러일전쟁 2개월 후인 1905년 11월 9일 일본 총리대신을 지낸 이토 히로부미(1841~1909)가 일왕 특사로 경성(서울)에 도착합니다. 이튿날 이토는 일왕의 친서를 전합니다. "짐이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대사를 특파하오니 대사의 지휘를 따라 조처하소서."

11월 15일에는 외교권 포기 조약서를 내놓고 고종을 협박했습니다. 11월 17일 일본은 갖은 방법으로 조약 체결을 강요했지만 오후 3시가 되도록 결론을 얻지 못했고 어전회의(御前會議)가 열립니다. 긴 회의의 결론은 조약 체결 불가(不可)였습니다.

이 소식은 바로 이토의 귀에 들어갔고 이토는 총칼로 차단된 회의장에서 대신 8명을 하나하나 협박하며 찬반을 묻습니다. 참정대신 한규설(韓圭卨)과 탁지부대신 민영기(閔泳綺)는 적극 반대했습니다. 이토는 찬성하는 5명을 근거로 강압적으로 조약을 체결하게 했습니다. 18일 새벽 1시 경이었습니다.

조약에 찬성한 을사오적(乙巳五賊)이 학부대신 이완용(李完用),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 농상공부대신 권중현(權重顯)입니다.

그래픽 박미진.그래픽 박미진.
광무 9년(1905) 11월 17일자의 조약서 제1조에서 "일본국 정부는 도쿄에 있는 외무성을 통하여 금후 한국과 외국의 관계 및 사무를 감리⋅지휘하고" 했습니다.

조약 체결 4일 뒤인 22일 고종은 미국에 체재중인 황실고문 헐버트(Hulburt, H. B., 1863~1949)에게 전보를 보내 이를 미국과 만방에 알리게 했습니다. "짐은 총칼의 위협과 강요 아래 최근 양국 사이에 체결된 이른바 보호조약이 무효임을 선언한다. 짐은 이에 동의한 적도 없고 금후에도 결코 아니할 것이다. 이 뜻을 미국 정부에 전달하기 바란다."

고종은 1907년 6월의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준(1859~1907) 열사 등을 파견하여 을사늑약을 바로잡으려 했지만 이를 발단으로 이 해 7월 19일 강제 퇴위됩니다.

이토는 1909년 10월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1879~1910)의 거사로 죽고 이완용도 두 달 뒤 이재명(1887~1910) 의사의 감행으로 중상을 입습니다.

1910년 일본에서 새 통감이 부임하고 같은 해 8월 22일에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일본 통감 데라우치의 이름으로 한일강제병합 조약이 체결되고 29일 공표됩니다. 경술국치(庚戌國恥)입니다.

조약 제1조가 이렇습니다. "한국 황제폐하는 한국 정부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 또 영구히 일본 황제폐하에게 양여한다."

남북이 갈린 한반도와 동아시아, 미국과 중국의 갈등과 인도 태평양 등 국제 정세가 어지럽습니다.

한참 세월이 지난 후 우리 후세는 지금을 어떻게 해석하고 회고할까요. 한일 갈등에 관한 윤석열정부의 해법이 단선적이어서 심히 우려됩니다.

CBS논평이었습니다.

[지형은 목사 / 성락성결교회, 한목협 대표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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