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
오늘(10월 31일)은 종교개혁기념일입니다.
'종교개혁자' 하면 보통 루터와 깔뱅, 츠빙글리 등 특정 인물만을 떠올리기 마련인데요.
하지만 종교개혁은 소수의 영웅이 아닌, 수많은 개혁자들의 동역과 헌신을 통해 이뤄진 거대한 역사의 변혁이었습니다.
종교개혁일을 맞아, 16세기 스위스의 종교개혁자 '피에르 비레'의 삶을 돌아봅니다.
오요셉 기자입니다.
피에르 비레가 로잔에서 처음에 머물렀던 생 프랑수아 교회 정면에 있는 기념 명패.[기자]
1511년 스위스 오르브에서 태어난 피에르 비레는 스위스 종교개혁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물입니다.
25살의 젊은 나이에 스위스 로잔의 목회자로 청빙된 비레는 22년을 로잔에서 사역하며 사회 전반에 걸친 개혁을 주도했습니다.
또, 기욤 파렐, 장 깔뱅과 함께 '제네바 종교개혁의 삼총사'라 불리며 제네바 종교개혁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말년엔 프랑스 남부와 당시 나바라 왕국 지역에서 개혁운동을 펼치는 등 일평생을 종교개혁에 헌신했습니다.
종교개혁기념조형물 왼쪽부터 파렐, 칼뱅, 베즈, 녹스비레는 특별히, 교회 질서를 바르게 세우고, 국가와의 관계에서 교회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강조하는 등 건강한 교회 만들기에 힘썼습니다.
[박경수 교수 / 장로회신학대학교, '종교개혁의 천사, 피에르 비레' 옮긴이]
"(정부) 행정가들이 모든 것을 간섭하고 교회의 자율성을 침해하려고 할 때, 비레가 어떻게 교회의 자율성, 독립성을 지킬 수 있을지 끊임없이 교회의 치리권, 권징의 권한을 두고 계속해서 논쟁을 벌이거든요. 그러면서 결국 교회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지키고, 또 복음으로, 말씀 설교로 교회를 세워나가고…"
비레는 교육을 통한 개혁에도 앞장섰습니다.
교회 안으로는 교리 문답 교육에 관한 중요한 저서들을 남겼으며, 교회 밖으로는 '로잔 아카데미' 등 사역지마다 고등 교육기관을 세웠습니다.
비레의 신학은 추상적 개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전쟁· 법률·세금 등 공적인 시민 생활의 현실적인 문제들을 주목하며 나라와 문화 전반을 변화시켰습니다.
[박경수 교수 / 장로회신학대학교, '종교개혁의 천사, 피에르 비레' 옮긴이]
"로잔 아카데미가 지금 로잔대학입니다. 이 로잔 아카데미는 그 당시에 불어로 가르치는 거의 유일한 신학교였고, 또 일반 시민을 육성하는 학교의 역할을 했거든요. 정치, 경제, 교육, 사회 모든 면에서 로잔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복음의 도시로 만들려고 했던 노력들이 곳곳에 묻어 있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오르테즈 잔 달브레 박물관 내부엔 비레가 세운 오르테즈 아카데미에 관한 설명이 있다. 비레는 1571년 5월 4일 프랑스 오르테즈에서 생을 마감했다. 무엇보다 비레가 오늘날 한국교회에 시사해 주는 바는 비레가 복음을 표현한 온화하고 평화로운 방식입니다.
종교를 이유로 전쟁도 불사하던 격동의 종교개혁의 현장 속에서 비레는 '종교개혁의 천사', '평화와 화해의 사도'라는 별칭을 가질 정도로 탁월한 중재자였습니다.
칼에 찔리기도 하고, 독에 중독되었다 가까스로 회복하는 등 수차례 목숨의 위협을 받기도 했지만 비레의 개혁운동은 언제나 설득과 포용, 화해의 태도 위에 있었습니다.
비레의 모범적인 생활과 진정성,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성품은 그를 적대했던 이들에게까지 신뢰를 얻으며 강한 설득력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박경수 교수 / 장로회신학대학교, '종교개혁의 천사, 피에르 비레' 옮긴이]
"우리 한국교회가 정말 신뢰를 회복해야만 우리 교회 안의 분쟁도 조정할 수 있고, 특별히 사회를 향해서, 또 무신론자들을 향해서도 우리가 품어내고 설득하는 이런 비레의 온화한 방법을 통해서 '설득의 리더십' 이런 것들이 한국교회에 꼭 필요하지 않을까, 비레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메시지는 '신뢰의 리더십'과 '외유내강의 내공'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사회 이념 갈등이 극심해지고 교회가 오히려 혐오와 갈등을 부추기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오늘날, 피에르 비레의 삶과 정신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보게 됩니다.
CBS뉴스 오요셉입니다.
로잔 대성당 안에 있는 1536년 로잔 논쟁 기념 스테인드글라스. 피에르 비레가 한가운데 서있고 사복음서가 펼쳐져 있다.[영상기자 최내호] [영상편집 서원익]